저토록 밝은데 이토록 어둡다니
나희덕, [月蝕]
거참 이상한 일이다. “정말! 다들 화끈하게 일어나고 있잖아!”라는 소문이 횡행하지만, 이곳은 고요하니 말이다. 분명 소란스러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산은 산대로 있고, 나무는 나무대로 있고, 물은 물대로 흐르고 있다.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이상적 산수화의 도상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그저 그것뿐이다. 어떠한 어긋남도, 요동치는 운동성도 그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하니 어쩌면 고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곳은 소란스럽단다. 정말! 다들 화끈하게 일어나고 있단다. 사정이 이러하니 거참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면 “정말! 다들 화끈하게 일어나고 있잖아!”는 여기저기에서 횡행한다는 소문이 아니라 소리 소문 없이 찾아온 헛소문일까. 
이은실은 직접적으로 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생의 주변 것들이다. 때때로 그것은 고요로 가득한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침묵을 강요받으면서 발설되지 않았던 것들이기도 하고, 때때로 너무 소란스러워서 저 깊은 곳에 묻혀 어둠의 세계에 놓여 빛을 보지 못한 것들이기도 하다. 즉 그저 소문으로만 존재했던 것들이다. 소문은 직접적으로 발성되지 못한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들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파장을 가지고 있기에 입에서 귀로, 또다시 입에서 귀로 은연(隱然)히 퍼져 나 갈 뿐이다. 그런데, 이은실은 소문의 차원에서 횡행하던 것들을 간취하여 발성한다. “저토록 밝은데, 이토록 어둡다니”라고. 소문은 발성되는 순간 더 이상 소문이 아니다. 그는 생의 주변(우리가 숨기려 했던, 그리고 말하지 못했던 그 모든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소문에 대한 진상 하나: 밝디 밝은 ‘금지’의 영역
이은실의 화면이 어둡지만, 밝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전통적 산수풍경(이것은 때로는 ‘방’이 되기도 한다)과 그곳에 낯설게 놓인 인물들이 맺고 있는 관계에 기인한다. ‘정말! 다들 화끈하게 일어나 있잖아!’는 전통적 방법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산수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있어야 할 장소에 있어야 할 것들이 모두 자리하고 있는 그의 산수는 관념적 산수를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관념 산수는 실재하지 않는 이상의 세계이다. 그러기에 그곳에는 현실의 요란하고 소란스러운 소음을 담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관념에 사로잡힌 이상적 언어만이 발설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곳은 고요하다. 어떠한 소문도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곳에 소문이 있단다. 이상적 세계에 놓인 소문은 제아무리 그것이 진실을 담고 있다고 한들 전면에 드러내지 못한다. 단지, 그 이상적 세계에 미세하게 드러난 틈새를 찾아 그곳에 숨기듯 내려놓을 수 있을 뿐이다. ‘정말! 다들 화끈하게 일어나 있잖아!’에서 산수풍경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뭉개진 산수 사이로 명확한 선들이 발견된다. 이것은 그리고 그것은 벌거벗고 있는 두 인간을 그려내고 있다. 그들은 산수풍경에 가려 전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그리고 산수에 가려 자신의 얼굴조차 드러내지 못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있다. 고요하고 심지어 적막하기까지 했던 산수는 숨겨진 사람들의 운동성에의해 소란스럽기까지 하다. 이러한 구조는 ‘방’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정좌하고 책을 읽고 있을 선비가 꾸부정하게 앉아 있다. 자신의 얼굴을 뒤로하고, 엉덩이를 까고 말이다. 그는 지금 배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방에서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룻배 위에서도, 계곡에서도 그 행위는 계속된다. 이은실의 인물은 전국의 산수를 방방 곳곳 돌아다니며 ‘배변 여행’을 하고 있다. 
그곳에 놓인 그들의 행위는 낯설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이 낯선 이유는 그것이 이상적 언어에서 이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적 언어가 만들어내는 세계는 고요하다. 그곳에는 그 어떠한 소문도 배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끊임없이 소문은 발생하고 있으며, 이 소문은 이상적 언어를 파편화시키거나 분절시키며 소란을 생성한다. 그러기에 저토록 밝은 곳을 이토록 어둡게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닐까. 다들 화끈하게 일어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 소문에 대한 진상 둘: 관음(觀淫)의 세계
그러나 역시 소문은 소리 높여 발성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이은실은 그것을 고요 속에 숨겨 놓았으며, 대상들은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으며, 보는 이 역시 힐끔힐끔 보게 된다. 작가/작품 속 대상/관객을 이어주는 것으로 이은실이 제시하고 있는 것은 문(창문)이다. 그의 그림에는 어김없이 문이 존재한다. ‘문’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기도 하며, 그것을 차단하기도 한다. 작가는 문을 열어놓았으며, 작품 속 대상은 문이 닫혀 있다고 생각하고 그곳에서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일들을 하고 있으며, 관객은 작가가 열어 놓은 문을 통해 쉽게 볼 수 없었던(문을 닫고 방에서 할 법한 일들) 것을 자유롭게 그러나 불안하게 보고 있다. 
이렇듯 이은실은 문을 사이에 두고 시선 놀이를 하고 있다. 작가는 문을 통제하고 있다. 그것을 외부의 시선에는 열어 놓고, 내부의 시선에는 닫아 놓는다. 심지어 내부에 있는 대상들은 외부를 직시하지 않는다. 그들의 얼굴은 가려져 있으며, 그들은 행위 자체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으로 드러난다(성행위 배변행위). 그들의 시선은 오직 자기 자신으로 흐르고 있다. 이러한 조건은 내부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행위에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고, 외부의 시선에는 마음껏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합당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를 통해 작가는 외부의 시선(관객)을 관음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조선후기 춘화나 음란소설의 삽화들은 숨어서 보는 듯한 구조를 제시한다. (영화 [음란서생]에서 볼 수 있듯이, 좀 더 자극적인 장면을 찾던 윤서는 자신과 정빈의 정사를 광헌이 숨어서 보게 한다. 그리고 그것을 그리게 한다.) 이은실의 화면 역시 문(창문)을 통해 이러한 효과를 극대화한다. 그러나 이은실은 춘화에서 볼 수 있는 직설적 어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행위의 직설성보다는 그것이 놓인 세계와 맺는 관계를 중심에 두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의 행위 묘사는 사실적이지도 자극적이지도 않다. 작가는 문을 통해 내부를 차단하고 그곳에 일어나는 일들을 외부의 시선에 노출 시키고는 있지만, 그 문은 다시 우리를 향해 닫히고, 내부의 대상을 향해 열려 있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은실이 제시하고 있는 관음의 세계는 내부와 외부가 상호 간 역학적 관계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다.    

새롭게 발견할 소문
소문은 뚜렷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한들, 소리 높여 발성되지 못한다. 소문은 현실의 불안정한 틈새를 오고 갈 뿐이다. 그러기에 그 메시지는 그것을 알아차린 자들에게만 전달된다. 우리 주변 여기저기에서 아무리 횡행하게 발설된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스쳐 지나갈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다. 이은실은 현실의 고요함에 숨겨진 것들을 소문으로 간취하고 그것을 발설한다. 소리 높여. 왜 “저토록 밝은데 이토록 어둡다”고 말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이 간취한 밝은 지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시되는 것은 소문에 대한 신선함이다. 그 소문이 진부하고 누구나 알 법한 것들은 작가가 아무리 소리 높여 외친다고 해도 전달되지 않는다. 앞으로 그가 현실의 틈새에서 발견할 소문을 기대해본다.
 
이대범, 미술평론가·독립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