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변할 것 같던 동양화단의 철옹성도 우후죽순 밀려드는 형식 실험의 여파로, 되돌릴 수 없는 세대교체와 직면했다. 새 세대의 실험은 압도적으로 전근대적 화풍에 지배된 동양화를 현대화 하려는 고민에서 출발한다. 이 와중에 성욕이라는 뜨거운 주제를 차가운 공간 안에 일관되게 도입한 이은실의 등장은 낯선 충격이었다. 더구나 고전 동양화의 형식과 기품을 거의 유지하면서 그 센 주제를 관철시키는 태도가 주목할 만했다. 주제로서의 성(욕), 재현 주체로서 20대 여성이라는 전례 없는 설정 또한 기존 대안 동양화가 그룹을 볼 때와는 상이한 차원을 요구하는 것 같았고, 본능적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은실은 줄곧 변형체를 그려왔지만, 형상된 경물(景物)이 성욕을 일관되게 지칭하는 건 모호하지도 않았고, 부인할 수도 없었다. 때문에 이은실이 이제껏 내려놓은 일련의 화면 앞에 서노라면 “이런 그림을 충동질하는 화의(畵意)는 도대체 뭘까”같은 호기심 찬 숙제를 보는 이가 자청해서 만들 게 된다. 모호한 형상 속에 선명한 주제. 이는 보는 이와 그림 사이에 팽팽한 긴장의 거리감까지 조성한다.  

이은실의 그림과 만날 적마다 반사적으로 떠오른 키워드를 단순 열거하면 대략 이렇다. 동양 미학의 공간 가치관 변주, 기하학적 공간 구성과 유기체적 운무(또는 잔털 뭉치) 사이의 충돌, 남근과 음문임에 틀림없는 상징물의 고정 출연, 핏자국으로 추정되는 흥건한 흔적과 그것이 남긴 미스터리. 한번 따져볼 만한 이들 키워드로부터 어떤 화론이 유추될까? 

이은실의 화면을 해독하는 직감적인 단서는 크게 공간과 성(욕)이다. 먼저 공간. 곽희(郭熙) & 곽사(郭思)의 ‘임천고치(林泉高致)’을 따를 때, 유교적 세계관을 투영하는 동양화의 공간 구성은 주봉과 주변의 봉우리를 군신 관계에 빗댄다. 반면 드물게 등장하는 이은실의 산수에선 봉우리 사이의 ‘확정된 서열’을 재확인하지 않는다. 뿌연 운무와 정체불명의 잔털로 공간에 잠재된 남성의 서열을 가린다. 그 덕에 속계의 서열을 규정짓던 봉건적 회화의 전통이 해체된다. 

공간을 바라보는 두 번째 관점. 투시도법에 의존하지 않는 고전 동양화는 사실상 비/초현실적 공간으로 수렴된다. 이은실은 오랜 전통의 동양화 공간의 초현실성을 기꺼이 수용하되 제 방식의 초현실성을 덧씌운다. 즉 동양미학의 투시도법을 따라서가 아니라 운무와 잔털로 가득 찬 공간의 제시로 초현실성을 확보한다. 뽀얗거나 더러 ‘농염한’ 안개에 쌓인 공간은 그 안에 재현된 대상을 식별하기 힘들게 한다. 그 덕에 그린 자와 보는 자는 불투명한 대기 속에 숨겨진 거대한 본능의 꿈틀거림을 품위 있게 관음하고 대화한다. 동양화의 여백 전통은 운무와 잔털들이 대체하는데, 불투명한 대기에서 피어오른 육감(肉感)은 오직 ‘경험 있는 감식자’만이 직감으로 읽어낼 수 있다. 이런 제한된 독해의 규칙마저 동양회화의 전통을 우연히 따르고 만다. 

공간에 대한 세 번째 특징은 실내에서 실외를 쳐다보는 시선이 잦다는 것이다. 실내의 기하학적 창틀 너머로 바깥을 응시하는 안사람(이은실 또는 여성성)의 관점이다. 안사람이 성에 관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응시/관음으로 한정된다. 화면에서 안사람이 응시한 대상은 욕정과 관련 있는 것 같지만 변태(變態)로 등장하기 일쑤여서 모호하다. 포식자 대 피식자 관계인 호랑이와 사슴이 정사 직후의 연인마냥 등장하는 ‘Desire’(2005), 상체를 바닥으로 굽힌 알몸 여체의 음문은 털 뭉치로 변형된다 ‘Into the hole’(2009). 욕정을 선명하고 과장되게 재현하는 방식(동양의 춘화나 서양의 외설물)이 남성의 전유물이라면, 이은실이 응시하는 욕망은 변형체라는 간접 화법의 탈을 쓴다. 사회 관행이 여성의 직설법을 용인하지 않으므로. 다만 해당 주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상이한 속성 사이의 잦은 충돌은 그림마다 미스터리를 남긴다. 가늘고 정교한 선으로 모사된 기하학적 공간 안에 담긴 무정형 에로티즘이 그렇다. 질펀한 정사는 전개되지 않으며, 격식을 갖춘 형식 논리에 주저 없이 수렴된다. ‘Confrontation’(2006)은 성별이 모호한 인체 둘을 미닫이문의 수직과 문지방의 수평에 각각 수렴시켜 차가운 형식에 뜨거운 욕정을 담은 대표작인데, 그림 속 충돌에도 불구하고 음란한 상상을 자극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이은실이 공간의 재구성으로 동양화에서 남성 지배 구조를 해체한 것처럼, 그녀가 재규정하는 또 다른 주제는 성(욕)의 주도권이다. 성도 남성 헤게모니만 재현하는 고유 권한이다. 모든 화면마다 똬리를 튼 이 선명한 주제는 어떻게 다듬어 질까. “이런 전례 없는 그림을 충동질하는 화의(畵意)는 대체 뭘까”하는 숙제로부터 이 글은 시작되었다. 섹스는 여성(화가)에게 무엇일 수 있을까? 그 기원은 성경험의 과거 개인사에서 출발할 지도 모른다. 과거의 어떤 경험이 저하시킨 자부심을 일깨우는 역할, 나아가 치유하는 역할을 성(재현)이 매개할 수 있으리라. 이 해석이 작가에게도 해당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재현을 통해 주도권을 이양되는 모습은 곧잘 관찰되다. 

비교적 초기작 ‘Attitude’(2004)와 상대적으로 근작 ‘Shy#1’(2010)은 자기 진술의 진전으로 보인다. 초기작은 주저앉은 여성의 하체에서, (이후 숱하게 반복되는 도상인) 막 새어나온 핏물 흔적을 그린 간략한 그림이었고 전달 메시지도 명료해 보였다. 그 흔적은 생리혈보단 첫 경험의 도상(圖像) 같다. 그래서 이 그림은 이은실이 이후 전개하는 긴 비망록의 시작점 같다. 그로부터 6년 지나 완성한 ‘Shy#1’는 앞서 열거한 키워드가 정교하게 결합되어 안정적이다. 여백 위에 기와지붕이 떠 있는 초현실적 구성. 하지만 관전 포인트는 기와지붕에서 자라난 모발과 기와지붕을 지탱하는 소음순 형태의 유기체이리라. 

모든 작품의 동기가 된 기원(개인사)을 캐물어 털어내지 않는 한, 이은실의 섹스 미스터리 연속극은 매해 경험할 상이한 층위가 덧씌워져 농염한 대기와 엄격한 구조를 지키며 계속 변주될 게다. 그러면 또 누군가가 약간 상이한 화제(畵題)를 달아 줄 것 같다.  

ps. 공간 해석을 ‘임천고치’의 관점으로 풀이한 건, 동양화가 정재호가 힌트를 줬다. 
 
반이정,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