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것들이 야기하는 불안’을 큰 주제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나를 억압하는 요소를 발견하고, 발설하고자 했던 이은실은 세필로 세밀하게 대상에 접근한다. 마치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 모든 것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모든 것들을 발언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보인다. 지금까지 이은실 작업의 큰 틀은 금기, 애매모호함, 경계, 불안이었다. 이를 표상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이 주제의 서사를 화면에 직접적으로 노출했다. 그러나 작업은 단순하게 불편함을 표현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았다. 무수히 쌓아 올린 그의 세필은 때로는 정적으로 대상에 고착되며, 때로는 동적으로 불안을 야기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작업은 근본적으로 그것들이 나를 왜 불편하게 하는지에 대한 언급으로 나아갔다. 그럼에도 다수의 평들이 이은실 작가의 작업을 동양화를 통해 불편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에 방점을 두었다. 동양화, 성, 성기, 배설 등이 작업 독해에 주요한 키워드로 사용되었다. 어떤 대상이나 매개체 없이 자신의 삶의 태도와 감정적 즉각적으로 화면에 투사되고 있다는 사실이 간과되었다.   

공간과의 조화/부조화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의 개인전은 항상 전시 공간의 자장아래 놓인다. 첫 번째 개인전은 ‘대안공간 풀’, 두 번째 개인전은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에서 열렸다. 두 전시장 모두 매끈한 화이트 큐브와는 일정 정도의 거리가 있다. (세 번째 개인전에 앞서 프로젝트로 서울시 종로구 누하동 256번지에서 열린 “roundabout 전시 프로젝트 03 이은실: 길 목” 역시 그러하다.) 거칠고 투박한 전시 공간은 오히려 작품의 의미를 견고하게 했다. 작품 가득 자리한 금기, 애매모호함, 경계, 불안은 자연스럽게 전시 공간으로 확장되었다. 우연히 선택된 전시 공간이 작품의 의미론적 층위를 견고하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주요한 것은 이것이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이번 전시 “부합”은 두 가지 의미에서 이은실 작가의 작업에서 분절점이다. 첫째, 공간과의 조화/부조화를 ‘의도적’으로 제기했다는 점이다. 둘째, 강력한 이미지, 그리고 그 대상을 세필로 다루면서 다소 제한적이었던 음핵을 화면 전면에 배치했다는 점이다. [[부합]]은 도심의 한 빌딩의 빈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사무적이고, 경직되고, 권위적인 공간을 찾았다.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의 의미가 공간으로 확장됐다면, “부합”의 공간은 의미의 확장을 받아주지 않는 공간을 찾으려 했다. 단순히 발설하는 그 자체만이 아니라 어떤 구조에서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동화되는지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 서울시 종로구 소공동 65-1번지 창강빌딩 1003호가 그곳이다. 작가는 이 공간을 임대하는 과정과 전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 마주했다. 그들은 불청객인 작가가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작품의 이미지처럼 작가는 그들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작가는 호의적이지 않는 태도와 마주했으며, 불편한 관계들과 대면했다. 스스로 외부인이 된 작가는 그들의 세계에 들어가려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귀를 기울여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그들의 마음을 헤아렸다. 만나고, 듣고, 나누고의 과정을 통해 그들과 동화됐으며, 어느 순간에 그들은 작가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작가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불편한 것들과의 대화
금지는 자신의 체계를 굳건히 하기 위한 방편이다. 역설적으로 나는 금지안에서 단단해진다. 어쩌면 이은실의 작업은 스스로 ‘타자’되기의 방편이었다. 굳건한 자신의 언어 체계를 의심하고, 그 빈틈과 뒷면은 파고들었다. 세필이 자아내는 세계는 불안하고, 음흉한 습지에 가까웠다. 안주가 아니라 탈주, 고착이 아니라 변형을 내재한 그의 작업은 두 번째 개인전 “애매한 젊음”에서 알 수 있듯 명증하지 않다. 이번 전시 “부합”에서 명확한 ‘명사적 세계’는 지양한다. ‘가장 외로운..’, ‘참아야 했는데’, ‘두고두고’, ‘나도 간다......!’ 등에서 알 수 있듯 작품 제목은 ‘애매한’ 세계의 유동적 상태를 지향한다. 금지로 완성된 굳건한 세계에 작가는 불안하고 애매한 존재이다. 작가는 이 상태를 유지하고 세상과 마주한다. 그들과 대면한다. 임대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받고, 창강빌딩 경비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창강빌딩 주변을 ‘살핀다.’ 
창강빌딩은 역설적으로 매력적이다. 도심 한 가운데에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지만, 또 다른 건물에 의해 비껴 있다. 시간은 창강빌딩을 건물을 후면으로, 골목으로 몰아냈다. 그러나 여전히 당당함은 유지한다. 건물의 외관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사무적인 태도는 여전히 보수적이다. 작가는 그곳을 대상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살며시 개입한다. 익숙한 전시 공간의 문법에서 벗어나, 그들의 ‘룰’에 따른다. 생경한 공간에서 생경한 언어를 구사한다. 자신을 불편하게 하므로, “만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직접 나서서 “만난다.” 그곳이 자신에게 금지를 요구했다면, 어쩌면 자신도 그들에게 금지를 요구했었다는 점을 깨닫는다. 나 역시 하나의 금지를 만들어내는 주체였다는 사실은 그들을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자로 만든다. 그리고 작가는 그곳에서 대화를 시도했다.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말을 건네고, 듣는다. 

애매하고 불안한 나의 세계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 보자. 앞서 언급했듯이 [[부합]]의 작품들은 명사적 세계가 아니다. 애매함의 세계이다. 금지의 확정된 이미지를 보여주던 전작들과 다르게 “부합”은 애매함, 불안, 경계 자체를 보여준다. 세필로 대상을 쌓아가는 수고는 여전하지만, 확정된 이미지를 제시하지 않는다. 화면은 사건이 아니라 동요하는 상태 자체를 지향한다. 이제 작가는 금지를 규정하는, 고발하는, 발설하는 절대적 권위의 지위를 포기한다. 그럼으로 자신을 더 고찰한다. ‘나에게’ 금지, 애매함, 불안, 경계가 무엇인지 되묻는다. 그간 세필이 대상을 다루었다면, “부합”은 나를 어루만진다. 돌아본다. 의심한다. 반성한다. 세필은 멈추지 않고 쌓인다. 작가는 화면 앞에서 자신을 만난다. 애매하고, 불안한 자신을 말이다. 그간의 개인전에서 작가는 ‘저 멀리’에서 세계를 관조했다. 이제 한 발을 세계 안으로 들여놓았다. 그리고 힘겹게 한마디 말을 내려놓았다. 이제 저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가 되었다. 이제 그의 답이 궁금해졌다. 천천히, 느릿느릿, 오래오래 그 답을 찾기 바란다. 
 
이대범, 미술평론가·독립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