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실(b.1983)과 그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2006 서울대학교 졸업 미전”에서였다. 다소 몸에서 겉도는 성장을 하고 머리에 잔뜩 웨이브를 넣은 그의 모습은, 마치 1980년대의 이화여대생을 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범상치 않은 눈빛만은 ‘시간대를 초월하는 정신세계를 지녔다’고 증언하는 것 같았다. 예의상, 너무 에둘러서 말했나? 그럼, 좀 더 생생한 느낌이 나도록 고쳐 말해보자. 이 여자, 분명 제 정신이 아닐 듯싶었다.

졸업 미전에 출품된 이은실의 작품들도, 그린 이의 정신세계가 일반인의 시공간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묵묵히 웅변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망’이라는 제목의 수묵채색화는 이렇게 저렇게 조합해 만든 고요한 산수의 풍광을 제시하는데(사실 자세히 보면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 곳은 창문 너머의 공간으로 제시돼 정상성의 시공간과 대별된다. 그 가운데 단연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발기한 성기를 늘어뜨린 숫호랑이와 성기에서 피를 흘리는 암사슴. 따라서 처음엔 이 황당한 상황 설정에 정신이 팔려, 노골적으로 성기를 은유하는 바위와 골짜기, 연못, 폭포, 나무 등이 두 마리의 짐승을 위한 미장센 노릇을 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기 어렵다.

작품들은 하나 같이 몽롱한 성욕의 세계에서 번져 나오는 습한 공기로 가득했다. ‘대체 이 학생은 뭘까’하며 흥미를 느낀 나는, 명함을 건네고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친구들에게 작품 설명을 해주느라 정신이 팔린 이은실은, 옆에서 기다리는 낯선 사람에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설명을 듣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남학생 둘에 여학생 하나였던가,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꽃다발을 들고 있던 남학생의 표정만큼은 지금도 생생하다. 공대생처럼 생긴 그는 필경 동아리 친구였을 텐데, 그는 이미 거침이 없는 이은실의 작품 해설에 완전히 압도된 상태였다. 얼굴 표정을 문장으로 번역하면, ‘엄마야, 나는 어서 집에 가고 싶어요.’ 정도? 꽃다발을 쥔 그의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몸이 굳은 것은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온 친구 옆에 바싹 붙어서 설명을 듣는 다른 남학생의 표정은, ‘미대생 이은실이 노골적인 성적 욕망의 이야기를 술술 늘어놓으리라고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친구들이 당황하는 수준을 넘어 약간의 공포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차리지 못한 이은실은, 설명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마치 고등학교의 윤리 선생님이 기계적으로 교과 내용을 설명하듯 그림을 설명해 나갔다. “호랑이가 사슴을 겁간했는데, 사슴은 상처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불가항력적 힘에 이끌려서 호랑이를 몰래 바라보고 있는 거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를 훔쳐 듣다보니, 꽤 보수적인 서울대 동양화과에서 어떻게 이런 종류의 작업이 생존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갔다. 너무 해맑게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고 추진하는 탓에, 교수나 강사들은 언제 어떻게 이 문제적 학생을 제지해야할 지 몰라 기회를 놓쳤을 테다. (두려움이 없는 하루 강아지를 호랑이가 덥석 물어 죽이지 못하고, 죄책감이 없는 성추행범의 손길에 피해자가 즉각적으로 비명을 지르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고나 할까?) [...] 얼마 뒤, 졸업전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들을 미술 잡지의 지면에서 소개할 기회가 있었고, 당연 이은실도 취재 대상이 됐더랬다. 당시 그는, 대학 시절 가장 뿌듯했던 일이 “이 한몸 다 바쳐 사랑했던 것”이고, 개인전을 열고 싶은 곳은 “창경궁”이며, 10년 후엔 “세계를 누비며 활발히 작업을 하고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쌈지레지던시프로그램에서 마주한 이은실은, 대학 졸업전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불과 채 2년이 지나지 않았는데, 다소간 지친 모습이다. 작품의 수가 너무 적은 것 아니냐고 물으니, 한동안 작업을 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작업이 삶에 너무 밀접하게 공조되거나, 혹은 삶이 작업에 큰 영향을 받게 되면, 종종 문제가 발생한다. 좋을 때는 작업도 잘 나오고, 삶에도 탄력이 붙지만, 그 반대의 주기가 찾아오면, 다시 털고 일어서기가 영 쉽지 않다.

개인적으로 작가를 잘 아는 것은 아니므로 무엇이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작품을 풀어가는 방식을 좀 정리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현재 이은실의 작품들을 보면, 남상하는 문제의식이 하나로 뭉뚱그려져,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모르는 형국이다. 그의 그림엔, 성교와 배설의 서사에만 주목하면,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 층위들이 꽤 많다. 일단 아무렇게나 해부해보자.

• 남성기, 여성기, 젖꼭지, 항문, 엉덩이 등의 페티시를 통해 드러나는, 고통의 영역에 중첩되는, 성적 쾌락 (기승전결이 분명한 남성적 오르가즘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그림에선 남성의 쾌락도 여성의 클리토리스 중심적 오르가즘처럼 파도치듯 반복되는 오르가즘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그림 속의 남성기는 크게 과장된 모습인 경우라 해도, 마치 클리토리스의 확장 형태처럼 독해된다. 대표적인 예가 작품 [사정지통]이다. 숫사자는 사정한 뒤의 쾌락, 즉 자신의 ‘포스트-오르가즈믹 칠’(여성이 오르가즘 뒤에 겪는 가벼운 오한과 멜랑콜리한 감정)에 몰입하는 모습으로 묘사됐는데, 이 세상에 그런 이성애자 남자는 없다. 대부분의 남자는 사정한 뒤엔 바로 딴사람이 되는 법.)
• 인간남녀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짐승들(거대한 여성의 성기를 지닌 사슴, 거대한 남자의 성기를 지닌 사자 등)
• 충혈 상태의 말단 이미지(실핏줄의 페티시)
• 자연 염료 성분을 채색하고 건조하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함으로써 형성된 갑갑하고 습한 느낌의 색조
• 붉은 피의 상징적 등장
• 번져나가는 분비물의 표현
• 물(강, 폭포, 연못 등)의 상징적 등장 (삶과 죽음의 경계, 분출하는 욕망 따위의 중의적 알레고리)
• 쪼그리고 앉아 배설하는 남자 (고사관수도 따위의 인물을 대치하는 설정)
• 짜깁기를 통해 재구성된 산수풍경 (전거가 되는 그림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 미장센으로 등장한 나무의 체모 같은 표현 (미약한 수준의 초현실주의적 이중 이미지가 등장하기도)
• 미장센으로 등장한 바위와 골짜기의 남녀성기 같은 표현
• 몽롱체(朦朧體)의 양상을 띠는 촉각적인 점의 축적
• 머리카락의 페티시
• 피학과 가학의 드라마
• 안팎의 경계를 드러내는 (전통) 건축 공간의 은유
• 기타 등장 요소: 달, 해, 무덤, 변기 등
• 은유적인 작품 제목
• 상당한 볼륨감을 갖는 장지 배접의 프레임

이 모든 요소들을 한데 안고서 일관된 형식의 연작을 그려나가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건 좀 무리가 아닐까. (때로는 작가가 뱉어놓은 도저한 주제가, 작가 자신을 압도해버리는 수도 있다.) 지금까지 나온 그림들은 일종의 청사진이다. 내가 가진 문제의식이 무엇이고, 내가 어떤 사람이며, 앞으로 작업을 통해 풀어 나가야 마땅한 (혹은 물어 나갈 수 있는) 주제는 무엇인지 보여주는 미완의 지도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주체할 수 없는 무엇을 쏟아낸 결과만이 ‘진짜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오산이다. 에너지 투여가 많은 작업이 관객에게 더 어필하거나 더 잘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내면의 밑바닥에서 게워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젊은 작가에겐 축복이다. 아직은 젊으니까 계속 토하며 극단으로 자신을 밀어붙여보는 일도 가능하겠다. 하지만 계속 토악질을 시도하는 것은 현명치 않다. 토사물들을 잘 가늠해서 하나하나 다시 재분석하고, 더 키워 볼 것들이 발견되면 확실히 더 배양해봐야 옳다. (이미 흥미로운 것들을 많이 토한 상태다.) 그림 그리는 일을 직업으로 삼자면, 오래오래 작업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과욕을 버리고, 과제들의 우선순위를 정해 다시 냉정하게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게 전업 화가를 지향하는 사람의 자세다. 예를 들어, ‘이번 상반기엔 체모의 페티시라는 주제를 호랑이와 사슴의 국부 클로즈업으로 탐구하는 30점의 연작을 제작한다’고 마음먹어보면 어떨까. 

추신. 본격적으로 작품을 분석하고 평하는 일은, 평자와 작가 모두를 위해, 내일의 과제로 아껴두기로 하자.
 
임근준(aka 이정우), 미술·디자인평론가